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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피델 카스트로, 90세 사망…냉전시대 마지막 혁명가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중남미 등 제3세계 좌파의 ‘맏형’ 
더부천 기사입력 2016-11-26 16:18 l 강영백 기자 storm@thebucheon.com 조회 7316


쿠바의 독립영웅이자 공산혁명의 상징으로 향년 90세의 나이로 26일(한국시간) 타계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전 국가평의회 의장. 사진은 1985년 시가를 피우는 모습. 사진/CNN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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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25일(현지시간) 밤 타계했다. 향년 90세.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 9월 쿠바를 방문한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와 면담하면서 아디다스 제품의 파란 츄리닝 복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마지막 공개 석상의 모습이었다.

앞서 지난 4월 아바나에서 열린 쿠바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 폐회식에서 “나는 곧 90살이 된다. 곧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 것이며, 시간은 모두에게 찾아온다”며 죽음으로 암시하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1월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친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공산 혁명에 성공한 뒤 반세기 동안 쿠바를 이끌며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던 냉전체제의 한 축을 담당해 냉전시대의 마지막 혁명가인 셈이다.

1926년 8월 동부 오리엔테주 비란의 스페인 출신 이주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아바나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1947년 쿠바인민사회주의당에 들어가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친미 군사독재정권이 세워진 1952년‘7월26일 운동’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피델 카스트로라는 이름에는 늘 ‘체 게바라’의 이름과 베레모에 검은 수염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쿠바 혁명의 두 주역이다.

1953년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전복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2년 뒤인 1955년 특사로 석방돼 멕시코로 건너갔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사를 만난다.

피델 카스트로는 “나보다 더 혁명적”이라고 평가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39ㆍ1928년 6월14일~1967년 10월9일)와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두 혁명가는 1956년 11월 그란마호에 몸을 싣고 쿠바에 들어온다.

3년 뒤인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 등은 마침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피델과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는 국가토지개혁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며 사회주의 정책을 펼친 쿠바 사회주의정권의 두뇌 역할을 했다.

체 게바라는 안락한 삶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1967년 쿠바를 떠나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사회주의혁명 운동을 이끌다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반면 피델 카스트로는 49년간 쿠바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고,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후 쿠바 수도 아바나에 그를 기념해 만든 25m 높이의 거대한 청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후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고, 사회주의 체제를 실험했으며, 중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좌파의 맏형 역할을 하면서 혁명 투사로 칭송받고 독재자로 지탄받으며 그의 인생은 논쟁적이었고, 세계는 적과 동지로 갈라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반세기 동안 총리, 공산당 제1서기, 국가평의회 의장을 역임하며 쿠바를 이끌었고, 2006년 건강상의 이유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정권을 넘긴 뒤 2008년엔 공식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피델 카스트로는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서 혁명 투쟁을 시작해 한 줌의 재가 돼 다시 시에라마에스트라로 돌아간다.

쿠바 정부는 25일(현지시간) 9일간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피델 카스트로의 주검은 26일 화장돼 항아리에 담겨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안치돼 조문객들을 맞고, 29일에는 아바나 혁명광장에 추모소가 차려져 대규모 추모집회가 열린다.

항아리를 실은 행렬은 30일부터 12월2일까지 1950년대 혁명군의 행로를 거슬러 내려가 아바나에서 시에라마에스트라로 향해 12월4일 오전 피델의 유해는 호세 마르티가 묻힌 산타이피헤니아 묘지에 안장된다.

쿠바 혁명 후 피델 카스트로는 농지개혁과 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혁명조치들을 실행했다. 농민들은 환호했소, 무상교육·무상의료 시스템은 노동자들과 도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사회복지 개혁은 인상적이다. 집권 첫 30개월간 만든 학급 수는 그 이전 쿠바가 30년간 설치한 학급 수보다 많았다.

문맹은 사라졌고 의료시스템은 세계의 칭송을 받았다. 쿠바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사를 해외에 파견하는 나라이며, 유아사망률은 1천명당 4.7명으로 미국보다도 낮다.

하지만 경제가 문제였다. 미국의 봉쇄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1962년 시작된 미국의 제재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불만을 품은 쿠바인들은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보트에 몸을 실었으며, 쿠바혁명 후 지금까지 쿠바를 떠난 사람은 100만명이 넘었고, 냉전이 끝나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 경제는 또다른 충격을 받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카리브해 작은 섬의 지도자에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대부’가 됐다. 그는 혁명조직의 훈련이나 육성을 지원하며 제3세계 국가들을 이끌었다.

소련이 무너진 후로는 중남미 사회주의의 ‘대부’가 돼 베네수엘라 등 남미 사회주의 정권과 연대했지만 독재정권을 전복시킨 그 자신이 장기집권자가 됐고, 표현과 집회·결사, 언론의 자유는 제한됐다. 피델 카스트로가 떠난 쿠바는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 이끌고 있지만 피델이 남긴 모든 유산은 시험대에 올랐다.


쿠바혁명의 주역인 피델 카스트로(왼쪽)와 체 게바라(Che Guevaraㆍ왼쪽). 1956년 촬영 사진. 사진/CNN 캡처


1995년 피델 카스트로. 사진/CNN 캡처


2004년 피델 카스트로. 사진/CNN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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